거사풍과 새말귀

새말귀라는 수행방편을 정립하다

1976년 새말귀라는 수행방법론을 정립한 후 거사는 새말귀 수행이 과학이 발달한 이 시대에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가장 좋은 수행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깨달음을 통한 그 본래의 지혜와 20년 동안 학인 들을 지도하며 경험한 것이 새말귀에 종합되어 있습니다. 새말귀에 대한 소개의 글은 [절대성과 상대성] 책에 들어있는데
1. 거사풍을 세운다
2. 새말귀
3. 인생선언문의 순으로 전개했습니다. 이곳에서는 글의 길이를 감안해서 순서를 바꾸었습니다.


인생선언문

태허(太虛)는 영역(領域)이 없다.
그러나 그 체성면(體性面)은 공적(空寂)하면서도 호연(浩然)하니
상하(上下)와 사유(四維)를 두어서 삼계(三界)를 세우고,

심성(心性)은 변제(邊際)가 없다.
그러나 용상면(用相面)은 확연(廓然)하면서도 탕연(蕩然)하니
정사(正邪)와 돈점(頓漸)을 두어서 만법(萬法)을 굴린다.

이 가운데에 인생이라는 명자(名字)가 있으니
이 명자(名字)는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두어서 부귀빈천(富貴貧賤)을 굴리고
부귀빈천은 희로애락을 굴려서 은원증애(恩怨憎愛)를 말아내니
이 이(理)이냐? 이 사(事)이냐?
이 진(眞)이냐? 이 가(假)이냐?

어즈버야,
이(理)와 사(事)의 앞소식에 이(理)와 사(事)가 따로 없으니
야반(夜半)에 토각장(兎角杖)을 짚음이요,
진(眞)과 가(假)의 앞소식에 진(眞)과 가(假)가 따로 없으니
풍두(風頭)에 구모불(龜毛拂)을 가짐이로다.

이 당처(當處)인지라 의취(意趣)가 심오(深奧)하니
사람들은 제가 모르고 화택(火宅)중을 향하여 달리며 울부짖을 뿐이니
노사나불(佛)의 얼굴에는 봄바람이 가심이로다.

그러나 머리를 크게 돌릴 새 이에 불자(佛子)가 있으니
삼계(三界)를 처리하고 만법(萬法)을 정리할 의무도 있지마는 권리도 당당히 있는 불자이다.
우리 불자들은 문수의 채를 신호로 보현의 춤에 발을 맞추어서
대도(大道)를 행하며 가기를 천하에 선언하노라.

  1. 나는 인생본래의 면목(面目)을 되찾기 위하여
   번뇌(煩惱)와 진로(塵勞)가 전부인 이러한 인생을 거부한다.

  2. 나는 인생본래의 영지(靈知)을 되찾기 위하여
   생로(生老)와 병사(病死)가 전부인 이러한 인생을 거부한다.

  3. 나는 인생본래의 평등(平等)을 되찾기 위하여
   기복(祈福)과 구명(求命)이 전부인 이러한 인생을 거부한다.

 

새말귀

공안(公案)을 화두(話頭)라고도 한다.
이 화두는 번뇌(煩惱)와 망상(妄想)을 걸러 내는 체요, 사량(思量)과 분별(分別)을 가려내는 조리다.
화두는 빛깔(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닿질림(觸)과 요량(法)인 육적(六賊)의 침범(侵犯)을 막아내는 수단(手段)의 화살이면서, 아울러 것(色),느낌(受), 새김(想), 거님(行)과 알이(識)인 오온(五蘊)의 난동(亂動)을 무찌르는 방편(方便)의 창끝이기도 하다.

생사(生死)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도를 닦는 학인(學人)에게는, 화두가 가장 훌륭한 수단이요 방편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1,700공안인 화두가 다 제각기대로의 뜻길이 다를지라도 필경에는 ‘이 뭣꼬?’로 맺어지는 말귀로서 그 말귀 속에는 만고(萬古)의 비밀이 잠겨 있기 때문이다.
물론 눈앞에 비치는 한 포기의 풀잎이나, 귓가를 스치는 한 가닥의 소리에도 태고(太古)의 소식이 감돌지 않음이 아니지마는, 그러나 화두는 의심(疑心)을 일으켜서 망상(妄想)을 제거하고 되돌아 이미 일으킨 그 의심처(疑心處)를 풀어 헤치기 위한 말귀라 하겠으니, 바로 허공을 찢어내는 소리라 하겠다.
까닭에 여기에 많은 견문(見聞)과 지식(知識)을 갖추어서 바로 의기(意氣)가 충천하는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 화두인 ‘이 뭣꼬? ’를 깨뜨리지 못한다면 이것은 한 푼의 값어치도 안 되는 건지혜(乾智慧)인지라, 대사(大事)는 결정짓지 못하는 것이다.
참으로 삼계의 화택(火宅)을 벗어나기 위한 공부를 짓는 데에 염불(念佛)• 간경(看經)• 기도(祈禱)• 주송(呪誦)이 방편이기는 하나, 화두를 수단으로 삼는 선(禪)은 방편중의 방편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방편인 선은 수단인 화두를 일념(一念)으로 순일(純一)하게 지닌다는 그 사실이, 지극히 엄숙하면서, 지극히 분명하고, 지극히 정묵적(靜默的)이면서, 지극히 독선적(獨善的)이다. 지극히 엄숙하기에 스승을 섬기고, 지극히 분명하기에 집을 뛰쳐 나고, 지극히 정묵적이기에 은정(恩情)을 끊고, 지극히 독선적이기에 세연(世緣)을 등지는 것이니, 내일의 대성(大成)을 위하여 돌진하는 승가풍(僧家風)의 모습이다.

속세(俗世)와는 동떨어진 승가풍이니, 이를 가리켜 몰인간성(沒人間性)이요 몰사회성(沒社會性)이라고 평(評)하는 사람도 있다. 은정을 끊음은 뒷날에 그 은정으로 하여금 한 가지로 보리도(菩提道)를 증득(證得)하기 위한 우선의 끊음이요, 세연을 등짐은 뒷날에 그 세연으로 더불어 같이 열반계(涅槃界)로 이끌기 위한 우선의 등짐이란 의취(義趣)를 모르기 때문이지만, 실로 화두를 순일(純一)하게 가지는 데는 혈연을 향하여 눈을 돌리고 세간을 향하여 귀를 기울일 틈도 없거니와 또한 있어서도 안 됨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거사풍(居士風)은 그렇지가 않다. 인간성이기 때문에 가정을 꾸미고 사회성이기 때문에 세간(世間)을 가꾼다. 가정을 꾸미기 때문에 오늘을 살면서 내일의 안정을 걱정하고, 세간을 가꾸기 때문에 오늘을 엮으면서 내일의 번영을 꾀하기 위해 시간을 쏟는다. 이러히 시간을 쏟기 때문에 아무리 생사의 뿌리를 캐어내는 좋은 수단이요 방편이라 할지라도 24시간 모두가 공부를 지을 수 있는 승가풍과는 달리 24시간 모두가 가정을 꾸미고 세간을 가꿔야만 하는 거사풍으로서는 화두를 순일하게 지닌다는 것이 지극히 어렵다기 보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럴진댄 무엇보다도 시간적으로 용납이 안된다 하여서 생사문제의 해결을 포기함이 옳을까?

안될 말이다!
생사문제의 해결을 포기함이란 바로 인생을 포기함이니, 도대체가 인생이란 무엇이며 어떠한 존재인가?

천하의 양약도 내 몸에 해로우면 독약이요, 천하의 독약도 내 몸에 이로우면 양약이니 화두도 이와 같아야 그 분수에 따른 복력(福力)과 신념, 지혜, 용기, 의단(疑團)과의 알맞은 조화가 이루어진다면 즐거운 열반락(涅槃樂)을 증득하는 양약(良藥)이 되려니와, 만약 분수대로인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평생을 그르치는 독약(毒藥)밖에 안 될 것이니, 이에 독을 독으로 다스리듯이 운명적인 거사풍이라 한탄하지 말고, 이 시점에서 거성(去聖)의 혓바닥에서 뛰쳐나온 화두는 도로 거성의 혓바닥을 향하여 되돌려 보내되, 이에 대치법(代治法)을 과감히 세워야 할 책임을 느껴야 한다,

무슨 뜻이냐?

사회문물의 발달에 따라 생활면의 각 분야는 분주하다. 이 분주한 생활선상에서 얽고 얽히인 인생인지라 화두를 순일하게 가질 수 없는 그 책임은 뉘라서 져야하는가?

선지식이 져야한다.
선지식이 지지 못한다면 뉘라서 져야하는가?

부처님이 져야한다.
부처님이 지지 못한다면 뉘라서 져야하는가?

내가 져야한다. 필경에는 내가 져야하기 때문에 과감하게 대치법(代治法)을 세우는 것이다. 대치법(代治法)이란 이렇다.

"연(緣)에 따르는 바깥 경계를 굴리고 또한 경계에 굴리이는 것은,
실로 나의 무상신(無相身)이 그 심기(心機)의 느낌대로 무정물(無情物)인 색상신(色相身)을 걷어잡고 행동으로 나툰다"
는 도리를 깊이 인식하고,
"모습을 잘 굴리자" 라는 말귀를 세워서 나아가자는 뜻이다.

거성(去聖)의 화두가 말귀이고 대치법도 말귀일진댄, 무엇이 다른가?
말귀는 말귀이나 말귀로서는 같지 않은 말귀이니 그 말귀를 굴리는데 따른 수단의 좌표(座標)가 다르고,
그 수단의 좌표가 다르기 때문에 방편의 초점도 다르기 마련이다.

무슨 까닭으로서이냐?
예를 들어서 만약 핸들을 돌리고 키를 트는 데도 잘 돌리고 잘 틀어야 할 것이니,
"모습을 잘 굴리자 "라는 말귀와는 통하여서 그 실을 거둘 수가 있겠으나
화두가 순일하여서는 또한 잘 안될 것이다.

사리(事理)가 이러하니,
학인들은 거사풍이라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서,
아침에는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뜻으로 세간에 뛰어들고,
낮에는 " 모습을 잘 굴린다"라는 뜻으로 책임을 다하고,
저녁에는 "모습을 잘 굴렸나"라는 뜻으로 희열(喜悅)을 느끼고,
시간을 얻어서 앉을 때는 나는 "밝음도 아니요 어둠도 아닌(非明非暗) 바탕을 나투자"라는 여김으로 삼매(三昧)에 잠길 줄을 알면, 이에 따라 깨친 뒤의 수행도 또한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이 마음을 도사려 가다듬음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사리를 따져서 알아 믿으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법은 본래로 쉽다는 생각이 생기기 때문에 어렵다는 생각도 생기는 것이요,
어렵다는 생각이 생기기 때문에 쉽다는 생각도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하여서 법을 굴리려 할진댄 쉬운 것은 쉬운 대로, 어려운 것은 어려운 대로 되돌린다면,
필경에는 쉽지도 않기 때문에 어렵지도 않을 것이요,
어렵지도 않기 때문에 쉽지도 않을 것이니
쉽고 어려움을 어디에서 찾으랴!

애오라지,
이 법은 깨친 앞이라 하여서 쉬운 것은 아니니 깨친 뒤라 하여서 어려운 것도 아니요,
깨친 뒤라 하여서 쉬운 것이 아니니 깨친 앞이라 하여서 어려운 것도 아니기에,
그만 그대로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말귀와
"바탕을 나투자"라는 말귀로 하여금
오전수행(悟前修行) 곧 "앞닦음"과 오후수행(悟後修行) "뒤닦음"을 한가지로 굴려가자는 것이다.

되돌아 보건대 이 대치법은 자타(自他)의 공덕을 이루는 수단도 되겠지마는
사회의 풍조를 다스리는 방편도 될 것이니 어찌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니랴!

어즈버야, 이 도리는 화두가 아니면서 곧 화두요
화두이면서 곧 화두가 아닌 "새말귀"라 이르겠으니
바로 가리사(家裡事)를 안 놓치고 도중사(途中事)를 굴리며
도중사를 굴리되 가리사를 안 놓치는 소식이라 하겠다.

이렇듯이 하나인 목적을 향하여 하나인 사명을 다하는 데도 그 수단과 그 방편이 그 때와 그 곳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 그 이유는 무엇인가?

승가풍에서는 그 학인으로 하여금 슬기를 살피고 신념과 정진력을 참작하여서 화두를 주는 것이 상례다. 당연한 일이다.하지마는 거사풍으로서의 대치법은,

첫째 설법을 통하여 일체 만법(一切萬法)인 상대성(相對性)은 본래로 흘연독존(屹然獨尊)인 절대성(絶對性)의 굴림새 라는 그 사실을 학인들에게 이론적으로 깨우치게 하고,

둘째 학인들은 반드시 무상법신(無相法身)이 유상색신(有相色身)을 굴린다는 그 사실을 실질적으로 파악한 다음에 새말귀를 지님이 규범적인 특징이라 하겠다.

저절로 그 수단과 그 방편은 동(動)과 정(靜)으로, 승(僧)과 속(俗)으로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동정(動靜)의 앞소식이 하나요, 승속(僧俗)의 앞소식이 둘 아닌 바에야,
승가풍은 승가풍대로 좋은 승가풍이요, 거사풍은 거사풍 대로의 좋은 거사풍인 터이니,
다만 그 때를 알맞게 맞아들이고 그 곳을 알맞게 살피면
식(識)이 멸(滅)하고 정(情)이 절(絶)할새 진불(眞佛)이 현전(顯前)할 것이어늘,
무슨 일로 고금(古今)의 수단과 방편을 정법(定法)인양 여겨서
권(權)과 실(實)을 맞세우고, 진(眞)과 가(假)를 견주며
오늘의 불행(不幸)을 탓하고 내일의 광명(光明)을 얻는데 인색하랴!

거사풍인 학인들이여!
"모습을 잘 굴리자"라는 일념(一念)으로 무상신(無相身)임을 돈증(頓證)하면
만겁(萬劫)의 공덕장(功德藏)을 성취하리니,
그 때를 기다려 동해수(東海水)를 일구(一口)로 흡진(吸盡)하기 바란다.


거사풍을 세운다

태고(太古)로부터의 소식(知音)인 기미(幾)가 의젓하거든!
이에 빛깔이 놓이면서 바람이 일고,
이에 안개가 번지면서 비가 뿌릴새,
한없는 허공중에서 한없는 산하(山河)를 나투니 이 나의 살림이요.
끝없는 성품중에서 끝없는 감정(感情)을 일으키니 이 나의 놀음이로다.

이러히 사(事)적인 살림이 있기에
하늘가에 떠도는 한 줄기의 구름을 걷어잡고 허공을 자질하며,
이러히 이(理)적인 놀음이 있기에
마음속에 일꺼지는 한가닥의 새김을 껴안고 성품을 손질한다.

실로 우주(宇宙)의 대법(大法)은
오직 한 줄기의 구름을 걷어잡고 허공을 자질함이니
이 바로 성품의 기미를 다룸이요.
인생의 공도(公道)는
오직 한 가닥의 새김을 껴안고 성품을 손질함이니
이 바로 허공의 소식을 거둠이로다.
어즈버야, 허공과 성품은 둘이 아닌 하나의 누리요
하나의 진리요, 하나인 목숨임을 입증(立證)함이 아닐까보냐.

어찌타, 하나인 목숨이요 진리인 누리는
제각기대로의 숱한 세계를 나투면서,
마침내엔 원치도 않는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두고
즐김터(安住處)와 뇌롬터(苦惱處)로 향하여 달리니,
이 참이냐? 이 거짓이냐? 판가름의 견줄 바 못된다.

그러나, 여기에 사람이 있다!
사람중에도 슬기로운 사람이 여기에 있으니
이 슬기로운 사람은 누리의 삶을 어떻게 엮는가?
오로지 수단방편(手段方便)을 다하여 생사업(生死業)을 걷어내고
적멸락(寂滅樂)을 바탕으로 세기(世紀)의 삶을 엮는다.

석가세존을 비롯한 역대(歷代)의 조사(祖師)와 선사(禪師)가
승가풍(僧家風)을 선양(宣揚)함도 이 때문이요,
유마보살을 비롯한 동서의 지식(知識)과 석학(碩學)이
거사풍(居士風)을 천명(闡明)함도 이 때문이니,
특히 중국(中國)의 이통현(李通玄), 배휴(裵休)와 방온(龐蘊),
해동(海東)의 윤필(尹弼), 진부설거사(陳浮雪居士) 등의 배출(輩出)은
도에 승속(僧俗)이 따로 없음을 들냄이 아닐까보냐.

승가풍(僧家風)은 세속(世俗)의 모든 인연(因緣)을 끊고
스승을 찾아 집을 떠난다.
한갓 떠도는 구름이요 흐르는 물이라
다만 도(道)를 구하는 마음씨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거사풍(居士風)은 그 목적이 비록 승가풍(僧家風)으로 더불어 같다고 이를지라도
그 수단(手段)과 방편(方便)이 다르다.
세속(世俗)에서 맺어진 생업(生業)을 가지고 혈연을 보살피면서 스승을 찾기는 하나 집을 지킨다.
한갓 덤불에 걸린 연이요 우리에 갇힌 매이지마는
항상 푸른 꿈이 부푼 것이 남과 다르다.

이러기에 승가풍은
입성부터가 단조로움도 비리(非利)를 엿보지 않음이니 공부를 짓기 위함이요,
먹성이 간략함도 음심(淫心)을 일으키지 않음이니 공부를 짓기 위함이요,
머무름이 고요로움도 자성(自性)을 어지럽히지 않음이니,
모두가 공부를 짓기 위하는 수단이요 방편이다.
까닭에 일상생활은 벌써 체계(體系)를 갖춘 도인(道人)의 풍도(風度)라 않겠는가!

거사풍은 그렇지가 않다.
가정을 가꾸는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에서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시간과 공간을 짜내어야 한다.
사업(事業)을 가꾸는 견문(見聞)과 각지(覺知)에서 말씨와 거동을 다스리는 견문과 각지를 짜내어야 한다.
사회를 가꾸는 도의(道義)와 신념(信念)에서 목숨과 복록을 다스리는 도의와 신념을 짜내어야 한다.
문화를 가꾸는 윤리(倫理)와 감정(感情)에서 이제와 나중을 다스리는 윤리와 감정을 짜 내어야 한다.

바야흐로 돌이켜 보건대
무거운 업력(業力)으로 하여금 어지러운 세정(世情) 속에서 내일을 위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인생의 원리(原理)와 누리의 본체(本體)를 캐어내는 방향으로 키를 바꿔 튼다는 사실은
입장과 조건에 따른 그 수단과 그 방편에서 비상한 각오와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승가풍 이상의 각오와 노력이 없어서는 한갓 벽에 그리어진 떡이나 마찬가지나
종요로이 큰 뜻을 세우는데 있어서만이
우리는 고(苦)에서 낙(樂)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고를 여의되 마침내엔 낙도 여윌 줄 알며,
악(惡)에서 선(善)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악을 여의되 마침내엔 선도 여윌 줄을 알며,
사(邪)에서 정(正)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사를 여의되 마침내엔 정도 여윌 줄을 알며,
생사(生死)에서 열반(涅槃)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생사를 여의되 마침내엔 열반도 여윌 줄을 안다.

때문에 구르고 굴리이는 온갖 차별현상은
그대로가 절대성의 굴림새로서인 상대성 놀이라는 사실을 깨쳐 알므로 하여금
법(法)을 따라 관찰하는 것으로서 수단과 방편을 삼는다.

무슨 까닭으로서이냐?
다시 말하자면 승가풍은 색상신(色相身)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먹고 입고 머무는데 아무런 걸거침이 없을 뿐 아니라,
시공(時空)에도 쫓기지를 않는다.
다만 선지식(善知識)과의 인연만 닿으면
도를 이룰 길은 스스럼없이 트이게 마련이지마는,

거사풍은 입장이 다르다.
삶을 가꾸고 엮기 위하여는
오늘을 살면서 내일을 생각하고 동(東)을 향하면서 서(西)를 살피거든!
이에 소를 탈 때에 말을 타고 말을 탈 때에 소를 타는 줄도 안다.
실로 오관(五官)을 굴려서 오식(五識)을 세우나 청정본심(淸淨本心)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음을 아는 까닭에,
일체법(一切法)을 그대로 굴리면서도 되돌아 일체법을 여의는 거사풍은,
현재의 사상(事象)만에 휘둘리는 중생풍(衆生風)과의 견줄 바는 물론 아니며
또한 일체법을 오로지 여의면서도 되돌아 일체법을 굴리는 승가풍의 수단과 방편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듯이 중생풍은 상대성을 껴안고 상대성 자리만에 맴도는 동중동(動中動)인 중생풍이라 친다면,
거사풍은 상대성을 휘어잡고 절대성 자리로 되돌리는 동중정(動中靜)인 거사풍이라 하겠고,
승가풍은 절대성 자리에서 상대성을 굴리는 정중동(靜中動)인 승가풍이라 하겠거늘,
여기서 어떻게 꼭 같은 풍광(風光)으로서인 수단이요 방편이겠는가?

우리는 비록 세전(世典)으로 더불으나
보리심을 내려고 애쓴 보람에
공덕(功德)을 갖추기 위한 탓으로 무위(無爲)에 머물지 않고,
지혜(智慧)를 갖추기 위한 탓으로 유위(有僞)에 다하지 않는 도리를 안다.
비록 범부(凡夫)는 아니나 범부법(凡夫法)을 뭉개지 않고
비록 성인(聖人)은 아니나 성인법(聖人法)을 여의지 않고
능히 범성사(凡聖事)를 다룰 줄도 안다.

무슨 까닭으로서이냐?
우리는 하늘과 땅의 앞소식인 나이기 때문이며
밝음과 어둠의 앞소식인 나이기 때문이며
착함과 악함의 앞소식인 나이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연(緣)을 좇으면서
비록 상대(相對)적인 색상신(色相身)을 나투기는 하지마는
실(實)로 낳음은 낳음이 아닌 거짓 낳음이기에 죽음이 따르고
죽음은 죽음이 아닌 거짓 죽음이기에 낳음을 보이는 줄을 안다.

이 낳음과 죽음은
바로 거룩한 나의 권리행사로서인 낳음이요 죽음이지
절대로 어떠한 성신(聖神)의 각본(脚本)에 따른 지음이 아니다.
만약 이 낳음과 죽음이
스스로가 스스로를 지어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엮어가는 인생의 굴림새가 아니고
바로 남의 각본에 따라 지어진 것이라면

도대체 나라는 나는 무엇이겠는가?
주동(主動)이 아닌 피동(被動)이요, 자립(自立)이 아닌 타립(他立)이니
이것은 한낱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아니다!!
나는
색상신(色相身)으로서인 법성신(法性身)이요,
법성신(法性身)으로서인 불괴신(不壞身)이요,
불괴신(不壞身)으로서인 무변신(無邊身)이요,
무변신(無邊身)으로서인 허공신(虛空身)이니

되돌아
유무(有無)를 여의었기 때문에 허공신(虛空身)이요,
시종(始終)을 여의었기 때문에 무변신(無邊身)이요,
생사(生死)를 여의었기 때문에 불괴신(不壞身)이요,
미오(迷悟)를 여의었기 때문에 법성신(法性身)이요 .
정염(淨染)을 여의었기 때문에 색상신(色相身)이다.

이 색상신(色相身)이 바로 나이면서
법성신(法性身)의 여김을 바탕으로 나의 분별(分別)을 세우고 온갖 법을 굴리기는 하지만
참으로 드높은 고개다.
이 고개는 승가풍으로서도 답파(踏破)하기 어렵다는 정평(定評)의 고지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니,
하물며 거사풍으로서이랴!

그러나 아무리 가정과 사회의 그물에 둘러싸인 거사풍일지라도
그 때와 그 곳에 맞추어서 무정법(無定法)인 수단과 방편을 세우고
숨을 거둘 때까지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면 되는 것이다.
왜냐면 나의 인생문제는 절대로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연있는 이 땅에 몸 받은 것을 기뻐하고
이 기회를 통하여 인생문제를 풀어헤치는 데의 의무와 권리를 뼈저리게 느끼되
지난날을 돌아다보면서 때가 늦은 것을 탄식하는 것보다
죽어도 내가 죽고 살아도 내가 산다는 사실 앞에
거룩한 본래의 의무와 권리를 이에 발동(發動)하여야 할 것이다.

허공이 끝이 없다 하여서 어찌 남의 허공이며,
산하(山河)가 다함이 없다 하여서 어찌 남의 산하랴!
인연(因緣)이 비었다 하여서 어찌 남의 인연이며
과업(果業)이 허망하다 하여서 어찌 남의 과업이랴!

부모형제가 소중한 것도 오로지 나의 소중한 바이요,
국가민족이 소중한 것도 오로지 나의 소중한 바이니
모든 법연(法緣)을 얼싸안고 절대성(絶對性)인 대원경지(大圓鏡智)를 향하기 위한
거사풍을 세우는 바이다.

이렇듯이 우리는 거사풍을 드높여서 겁(劫)밖의 인연이 있는 사람을 맞이하니
인연이 있거든 오고 없거든 가거라.
그러나 인연은 인연이나 이름뿐인 인연이란 그 도리를 알거든
가다가 돌아오라!

이렇듯이 우리는 거사풍을 드높여서 생사에 두려움이 있는 사람을 맞이하니
두려움이 있거든 오고 없거든 가거라.
그러나 두려움은 두려움이나 이름뿐인 두려움이란 그 도리를 알거든
가다가 돌아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