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봉거사 약력


부산 영도에서 출생하여 항일의 길을 걷다
1908년 2월 2일 한의원인 김해김공 봉한(金海金公 鳳翰)의 맏아들로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습니다. 1920년 만 12세의 나이로 영도초등학교에 입학하여 4년과정을 마치고 1924년 부산제2상업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러나 3년간의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1년 만에 중퇴하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1930년에 상업학교 선배인 정영모를 만나 부산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민족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부산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했습니다. 감옥에 면회 온 동생이 벽암록을 가져왔으나 무신론자인 그는 그 책의 내용에 관심이 없었고 또 난해한 그 글을 이해할만한 학문이나 불교 지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마침 부록에 참선법에 대한 소개가 있어 처음으로 그 글에 따라 잠깐 앉아보았는데 건물밖 전선에 앉아 있는 참새가 보여 신기했다고 합니다.

수형을 마친 그는 일제의 ‘요시찰인’이 되어 감시, 가택수색, 방해를 당하며 지내다 결국 부산을 떠납니다. 만주로 향했으나 그곳에서도 일제의 감시와 방해가 여전하여 정착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만주와 부산을 오가며 지내다 1937년 만주에서 체포되어 헌병대에 끌려갑니다.

관세음보살을 염(念)하다
헌병대는 감옥에 그를 감금하고 그가 접촉한 사람들을 체포해 고문을 하며 만주에서의 그의 행적을 캡니다. 감옥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감금되어 있었고 그 들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처형되어 사라집니다. 그곳은 법이 없었습니다. 그저 헌병대의 판단에 따라 처형이 결정되었고 그 결정에 인간의 존엄성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씩 처형되어 땅에 묻히는 것을 지켜보며 그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알고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문득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유치장 벽에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6~7개월이 지났을 때 벽은 명호로 가득했습니다. 헌병대의 수색에서 낙서한 것이 들통난 후 그는 유치장의 규율에 저항하고 위반한 새로운 사태로 더욱 불안해 합니다. 그러나 뜻밖에 헌병대는 그를 불러 조건부로 석방하겠다며 뜻을 묻습니다. 일본군 만주사령부의 요직을 받아 일제에 충성하든가, 아니면 죽든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죽음이 아닌 그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살기로 결심하고 목숨을 부지하여 그 자리에 앉았으나 그는 끝내 일제에 충성하는 행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핑계를 만들어 부산으로 돌아온 후 사령부에 사표를 보냅니다. 그 후 지하에 숨어 항일운동을 벌이다 해방을 맞습니다.

다시 감옥에 가다
1945년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며 그는 건국준비위원회 부산 중영도지구 간사장이 되어 일제로부터 통치권력을 인수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해방의 혼란 속에서 기근에 빠진 시민들을 보고 양곡창고를 열어 쌀을 나누어주었고 이것이 미군정청의 법령을 위반한 것이 되어 다시 부산형무소에 수감되게 되었습니다. 뒷날 재심에서 무죄로 결정되어 석방되었지만 이미 2년을 복역한 뒤였습니다.

정치계에 뛰어들다
이후 영도지역의 유지로 그는 부산남중, 남고 설립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다가 1958년 정치계에 들어갔습니다. 제4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에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공천에서 탈락합니다. 그는 뜻을 굽히지 않고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득표력을 보였습니다. 정당의 지원이 없었음에도 1위와는 근소한 차인 반면 자유당 후보와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자유당은 그의 능력을 인식했습니다. 야당인 민주당의 세가 강한 부산에서 자유당을 이끌 사람으로 인정하고 경남도당 부위원장으로 그를 영입합니다. 그러나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 자유당이 몰락하면서 그는 정치적으로 파산하고 도피하듯 부산을 떠나야 했습니다.

불교를 만나다
그는 서울, 인천에서 술을 마시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자신이 죽어 지옥에 갈 것이라고 걱정했습니다. 1963년 여름, 인천의 지인들과 어울리다 ‘불교의 상승도리를 만나면, 견성한 사람을 만나면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과 ‘지옥이 붙을 자리가 없다.’는 말을 듣고 그는 지옥을 면하는 길이 있음을 알게 되고 놀랍니다.

그는 도반들과 함께 관악산에 있는 절을 찾아갑니다. 그는 그전에도 절을 많이 찾았죠. 그러나 그것은 풍광이 좋은 곳에 가서 술을 마시며 놀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는 무신론자로서 불법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불법을 믿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치부했습니다. 그런 그가 드디어 불법을 들으려 절을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뒷날 그는 자신이 불법에 무지했으며, 여러모로 무식했다고, 참으로 무식했다고 자신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 절은 개인이 세운 작은 절이었습니다만 스님 한 분이 주지로 있었고 이 스님이 큰 인연이 됩니다. 스님은 ‘사술(邪術)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는 그를 꾸짖으며 올바른 수행의 길로 안내합니다. 그는 처음 사흘간은 다라니를 외웠고 아무 소득이 없자 다시 그 스님을 찾아가 ‘무자(無字)’화두를 받습니다.

무자화두를 참구하다
그는 치열하게 화두를 참구했습니다. 처음에는 화두가 잘 잡히지 않았지만 두세 달이 지나니 화두가 저절로 잡혔습니다. 잠을 잘 수 가 없었습니다. 잠을 자지 못해 몸이 마르고 상기병까지 앓았습니다.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화두를 버리고자 했지만 화두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화두 버리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1963년 12월 말에 그는 인천 및 서울의 도반들과 청주부근에 있는 작은 절로 정진을 하러 갔습니다. 산골짝 외딴 곳에 있는 민가였는데 한 도반이 그 집을 사서 심우사(尋牛寺)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는 정진을 하며 목탁소리가 두 개로 들리고 옆에 서있는 신장(神將)을 보며 의아해 했습니다. 도반들은 그가 어딘지 이상했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임을 느꼈습니다.

깨달음
한 도반이 어느 날 옆에 앉아 무문관(無門關)을 펼쳐 보였습니다. ‘즉심즉불(即心即佛)’이 보였습니다. 그는 ‘그거 뻔한 거 아닌가?’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습니다. 도반은 몇 장을 더 넘겼습니다. ‘비심비불(非心非佛)’이 적혀있었습니다.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았습니다. ‘즉심즉불’의 세계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삼계를 나투는 그 자리가 몸을 끌고 다님을, 육신은 그저 그림자임을, 생사가 그저 이름뿐임을 알았습니다. 도반들은 그를 향해 삼배를 올렸습니다. 1964년 1월 초의 일입니다.

그 때 오리쯤 떨어진 마을에 있는 교회당의 종이 울렸습니다. 그 종소리는 이제까지 들었던 종소리가 아니었습니다.

忽聞鐘聲何處來 홀연히도 들리나니 종소리는 얼로오노
寥寥長天是吾家 까마득한 하늘이라 내집안이 분명허이
一口呑盡三千界 한입으로 삼천계를 고스란히 삼켰더니
水水山山却自明 물은물은 뫼는뫼는 스스로가 밝더구나

1년 만에 금강경 해설서를 쓰다
인천으로 돌아온 날 밤 그는 금강경을 처음으로 펼쳐보았습니다. 그 경에 자신이 깨달음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 서술되어 있음을 보고 환희심이 일어 밤을 새며 읽고 분(分)마다 시를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깨달음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을 금강경을 수단으로 해서 가족에게 가르쳐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금강경 해설서의 원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깨달음을 지켜본 도반들은 그에게 설법을 부탁했고 그는 그 원고를 가지고 바로 설법을 시작했습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전준렬교수가 그 교재를 책으로 발행해 세상에 내 놓았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후 불과 1년 만이었습니다 세상은 그 책을 보고 백봉 김기추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대학생들이 그의 가르침에 환호하다
그는 서울로 자리를 옮겨 불암산에서, 정릉에서 자신을 따르는 보림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금강경을 강의하며 최상승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1968년 봄 연세대 2학년생인 이수열이 정릉으로 금강경 설법을 들으러 찾아 오면서 대학생들이 백봉거사를 찾게 됩니다. 그는 이 때부터 대학 방학인 여름과 겨울에 한달 가량의 집중수련대회를 열고 하루 여섯번 설법을 하며 참선수행을 지도합니다. 1969년 겨울 계룡산에서 대전고 학생들의 참선정진을 지도하고 이어 1970년에 대전 심광사에 머물며 대전불교학생회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이 일로 그의 대학생 포교는 날개를 달게 됩니다. 그후 수많은 대학생들이 부산 보림선원에서, 여름과 겨울의 철야정진법회에서 그를 만나고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됩니다.


청담, 대의스님이 출가를 종용하다
그가 심광사에 머물 때 청담스님이 대의 스님과 함께 그를 찾아왔습니다. '출가하면 조실자리를 주겠다'고 하며 출가를 종용했습니다. 그는 숙고끝에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성과를 내는 공부를 하려면 승려사회를 혁신해야 하는데 자신 혼자로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재가불교에 더 큰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출가를 거절하며 '집집마다 불당을 만들게 하고 싶다.'한 그의 말에서 그의 비전을 볼수 있습니다. 대의는 그 후에도 계속 그에게 출가를 종용했습니다. 부산에 머물 때에는 그에게 출가를 권유하는, 당시 덕망이 높았던 혜암스님의 편지(위조였음)까지 가져와 보여주며 출가를 요청했습니다만 그는 늙음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습니다


부산, 그리고 전국에서 최상승의 법을 설하다
그는 유성에 보림선원을 열고 대학생 및 스님들을 중심으로 선(禪)을 가르치다가 1972년 부산으로 선원을 옮깁니다. 이 때부터 12년간 부산 사직동, 광안동, 남천동에 머물며 부산, 서울, 대구, 목포 등에서 새로운 선(禪)수행 방편을 제시하고 거사풍(居士風)을 크게 일으켰습니다. 1984년 11월 지리산 기슭에 선원을 지어 이사했고 그 곳에서 이듬해 8월 2일 입적했습니다.